이민 세 살, 꿈틀꿈틀 탈피 초읽기

지난 1년간의 기록

모든게 새로워 재미있기도 하지만 어려울 때도 부지기수인 이민생활.

지난 한 해는 평탄한 해였지만, 내 개인적인 욕심으로 무척 마음 고생도 했던 해이기도 했다. 크게 아픈데도 없었고, 계획한대로 여행도 굵직굵직하게 다니며 사진도 많이 찍었다. 열심히 일했고 그만큼 휴식을 취했고, 짝궁과 서로 다독이며 목표를 하나하나씩 채워나갔다. 모자른 것 없이 넉넉했고, 불화도 없었고, 더없이 행복했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만족치 못하는 게 하나 있었는데, 바로 커리어였다. 사람이 참 간사하다. 이민 한 살 글을 쓸 때 만해도 어디라도 취업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는데, 막상 취업을 하니 더 큰 욕심이 생기더라.

근무한 지 1년이 가까워지면서 내 마음속에는 더 큰 일을 맡고 싶은 욕심, 더 잘할 수 있을거란 자신감, 더 큰 보상을 받고 싶다는 욕심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세계에 내놓으라는 글로벌 기업들이 있는 곳이기도 하고, 대기업이 아니더라도 파격적인 혜택들을 제공하며 인재유치에 혈안된 회사들도 많이 있는 곳에 살고 있으니 이런 욕심이 생기는게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회사업무가 손에 익으면서 이게 얼마나 힘들게 얻은 일자리인지를 망각한 채 신랑을 비롯하여 주변에 모든 미국인 친구들의 커리어를 부러워하기 시작했다.

지금 내가 맡고 있는 리셉션과 건물관리 직무로는 회사안에서 더 큰 일을 맡을 수 있는 단계엔 한계가 있었다. 이직 시 이 직무로 더 올라갈 수 있는 포지션은 Office Manager이거나 Executive Assistant인데 중소기업 미국회사에서 이 두 포지션이 흔히 맡고 있는 중요업무인 Travel Arrangement, Meeting Calendar Management, 그리고 Office Budget Management는 현 회사에서 아무리 오래 일해도 내부 규정 및 시스템상 내가 맡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또한 회사 자체가 수직적인 구조라 이미 정해진 규정 안에서 계약직인 내가 증명할 만한 기회도, 그만큼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은 없었다. 이러한 현실을 깨달은 나는 얼마 가지 않아 체념을 했고, 하루하루 뭔지 모를 불행함이 느껴졌지기 시작했다. 정말 다행인건 이 감정이 오래가진 않았다.

“현재 상황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바꿀 수 없다면, 그냥 마냥 불행하다고 느낄게 아니라, 상황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꿀 필요가 있지 않을까? 회사에서는 내가 맡은 일만 해내도 내가 할 일을 했다고 만족했을 지도 몰라. 내 욕심으로 일을 자처하여 한 건 결국 나이고, 그거에 대한 보상을 회사가 해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했을 때에 실망할 필요는 없어. 회사에서 내가 맡을 수 있는 일에 한계가 있다면, 다른 방법으로 배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면 되지…”

나의 관점을 바꾸기 위해서 회사를 통해 감사한 일들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 월급을 꼬박꼬박 주는 회사를 다니고 있다는 것
  • 일을 하면서 자존감 회복을 할 수 있었던 것/ 우울감이 사라진 것
  • 마음이 정말 잘 맞는 동료들과 일하는 것
  • 칭찬을 아낌없이 주시는 상사와 일하는 것
  • 내가 잘 하는 것을 할 수 있는 곳에서 일하는 것
  • 어떤 상황이든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회복한 것
  • 한국말을 잊지 않도록 매일 쓸 수 있는 곳에 일한다는 것
  • 한국을 홍보하면서 애사심이 부쩍 커진 것
  • 전공을 살려서 일할 수 있게 된 것
  • 회사에서 집으로 가져가는 스트레스가 전혀 없다는 것
  • 세일즈 압박이나 보고서 작성 압박이 없다는 것
  • 일하면서 특별히 아픈 곳이 없었던 것
  • 하루 7시만 일하여 내 시간이 많아진 것
  • 통근시간에 매일 책을 읽고, 팟캐스트를 들을 수 있는 것
  • 일하면서도 계획한대로 굵직한 여행들을 무사히 잘 다녀온 것

감사하는 마음으로 적어나가다보니 이 외에도 쓰지 못한 감사할 거리가 넘쳐났다. 비록 이 곳에서 내 개인의 욕심을 채울 순 없지만, 우리 회사가 앞으로 근무시간 외에 내가 따로 무엇을 배우던 인생에 정말 중요한 지렛대 역할을 해줄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사실 회사에서 내가 맡은 일들을 객관적으로 봤을 때 나의 성향, 강점과 정말 잘 맞는다. 이런 직무를 하게 된 것도 정말 하늘에서 내려주신 복이다. 어렵게 기회를 얻은만큼 회사에서는 내 역할을 다하고, 동시에 나 스스로 자기계발로 내실과 기반을 튼튼히 다지면 회사를 통하지 않고도 어느정도 내가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이룰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어

미국에 온 지 3년이 지났는데 내 영어실력은 내가 기대했던바와 달리 매끄럽게 다듬어지지 못하고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는 느낌이 든다. 하루 반나절 이상을 한국어를 주로 쓰는 회사에서 보내고, 유일하게 영어를 쓰는건 신랑이랑 집에 있을 때인데 퇴근을 하고 나면 자기 전까지 같이 있는 시간이 3-4시간밖에 되지 않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특별나게 엄청난 노력을 하지도 않았으니까. 진짜 세상엔 공짜는 없다. “영어를 잘하려면 영어공부를 하면 된다”라고 언젠가 사장님이 말해주셨는데 그게 정답이다. 따로 공부를 안하니 영어는 아무리 미국에 살아도 늘지않는다. 무언가에 꽂혀 밤을 새서 공부하던 때도 있었는데 이제는 그렇게까지 하지는 못하겠다. 장기전으로 바꿔 매일 조금씩이라도 읽고, 외우고, 실전에서 써먹으며 배우는 수밖에.

현지인들이랑 매일 같이 일하면서 듣고 똑같이 따라만해도 늘 것 같다는 생각에서 가끔은 회사에 미국사람들이 바글바글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봤다. 한국회사에 일하는 동안은 당장 행동과 언어를 모사할 모델이 없지만, 언젠가 LA를 떠나 한국인이 없는 곳에 가게된다면 아마 이 시간들이 정말 소중하게 느껴질 것 같다. 그때는 영어밖에 쓸 일밖에 없을테니 한국어를 쓰는 환경이 또 그리워지겠지? 지금 이 상황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열심히 한국어를 잊지않도록 써야겠다.

#결혼 생활 

외국에서 한해 한해 보낼 때마다 짝궁에게 감사한 마음이 깊어진다. 정말 더할 나위 없는 동반자다. 그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배려심이 좋고 어려운 행정처리부터 집안일 모두 도맡아서 잘 하는데다가 시가족과 나 사이에서의 조율도 정말 잘하고, 회사 일로 저녁 늦게까지 또는 주말까지 반납하며 일하기도 바쁜 와중에 우리 친정과 좀 더 많은 대화를 하고 싶다고 근처 대학에서 한국어 저녁수업도 일주일에 5시간씩 비밀리에 듣고 있는 사람이다. 알면 알수록 잘하는게 많고, 정말 좋은 점이 많은, 배우고 싶은 배우자이자 친구이다. 아이러니한 건 결혼 전엔 이런 사람인줄 몰랐다는 것. 내가 그를 이렇게 바꾼걸까? 아니면 그의 진정한 면모를 내가 몰라봤던걸까? 나도 이이를 만나고 좋은 사람으로 변하고 있을까? 그에게 나도 좋은 동반자였으면 좋겠다.

#미국생활

미국인들이 불친절하고 교만하며 자기주장이 강할것만 같던 나의 선입견은 이미 무너진지 오래됬다. 내가 만나왔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친절했다. 적어도 여태까지는 그랬다. 그리고 그렇게 무서워 하던 총기, 조폭들은 뉴스에서 말고는 들어보지도 목격하지도 못했다. 온전히 내 경험과 상황에 기반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사람 사는데 다 비슷하고, 이 곳도 각기 다른 장단점이 있지만 미국도 꽤 살만하다. 물론, 이러한 생각의 바탕에는 처음 외국에 사는게 아니라는 점, 이전에 살았던 호주생활이 미국과 아주 비슷하다는 점, 혼자서도 현지어로 행정처리를 할 수 있는 나라에 산다는 점, 남편과 시댁이 있는 곳이라는 점등이 종합적으로 작용했다. 이렇게 유리한 점들이 현지정착에 큰 도움을 주는 건 사실이지만 아직 모르는게 투성이라 매일 묻고 찾아보는 일이 일상이다.

혹자는 내게 미국 생활을 별로 어렵게 느끼지 않는 것 같다고 했는데, 나라고 별로 다르지 않다. 다만, 모르면 찾아보고, 어려우면 도움을 구하며 헤쳐나가고 있다. 일단 모르는게 생기면 인터넷 검색을 해보고, 확실성이 필요한 정보의 경우 관련부처를 찾아 직접 전화해서 물어보고, 전화문의도 탐탁지 않으면 방문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리고 내 선에서 해결에 어렵다고 판단되면 주변에 도움을 청한다.

모르는 걸 모른다고 인정하는 자세, 그리고 주변 지인들에게 모르는걸 알리고 도와달라는 용기, 모르는 걸 직접 찾아보기위해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발벗고 찾는 노력이 해외생활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자세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시댁과 신랑 친구들이 있어 주변에 도움을 쉽게 받을 수 있는 곳에 산다 하더라도, 내가 묻지 않으면 그들은 내가 어떤걸 모르는 지, 어떠한 부분에 도움이 필요한 지 모를테니 말이다.

#탈피, 그리고 진화

미국에 오고 첫 2년동안은 미국의 다른 점이 신기하다고만 생각했다. 물론 생활방식과 생활언어를 배우려고 눈과 귀를 다 열고 있었긴 했지만, 나는 여전히 지극히 한국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했었달까. 3인칭 전지적 작가시점에서 미국을 관찰하며 살았다고 표현하면 적합하려나. 하지만 지난 1년 사이에 나도 모르는 사이 어느 순간부터 내가 미국 문화의 일부를 체득하고 있는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Each and everyone around you shape you every day.”

이해가 안되었던 부분도 3년차가 되니 이 곳의 생활방식과 문화가 일리가 있다고 납득이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저건 배우지 않을꺼야!” 라고 했던 것들을 나도 모르게 하고 있는것들이 생겼다. 이게 외국에 살기 때문에 기존의 내 모습에서 변화하는 속도가 빠르게 된 건지 아니면 나이가 들면서 다들 이렇게 느끼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거주 환경, 주변사람, 그리고 내가 속한 사회가 매일 조금씩 나의 가치관을 다듬고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에 살면서 내 가치관의 어떤 점들이 바뀌게 되었는 지 몇가지를 나열해보자면, 다른 의견이라도 내 주장을 표현하는데 불편함이 덜 해졌다거나, 높은 톤으로 누군가 나에게 인사를 하는 모습을 보고 예전엔 그게 상당히 표면적이고 가식적인것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이유가 어떻든 누군가가 반가운 톤으로 나를 반겨주는게 좋아졌다. 처음엔 익숙하지 않았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며 이렇게 익숙해져가나보다. 해가 거듭되면서 나는 나의 가치관은 꼭 미국적이라고 하지 않더라도 계속 변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며,

욕심을 내서 더 가지려고 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일까? 어쨌든 다 행복하게 사려고 하는걸텐데. 최종 목적이 행복하게 사는 거라면, 지금이 가장 행복하니 더 하루빨리 더 큰 목적을 달성하겠다는 욕심을 성급히 낼 필요가 없지 않을까? 어쩔때보면 내 잔을 채우려고 억지로 노력하는 것보다 때론 비우려고 할 때 더 풍요롭게 채워지는 것 같다. 충분히 감사하고 행복한 한 해였는데, 괜한 욕심으로 나 자신을 힘들게 했다. 지난해 다짐했었던 소기의 목적을 다 이루지 않았던가. 지나친 욕심으로 나를 괴롭히지 않도록 상시 지각하고 있어야 된다. 막연한 욕심으로 가득찬 미몽에서 깨어나 자족감을 잃지 않는게 정말 중요하다. 그러니 올해는 더 많이 내려 놓고, 요행을 바라지 않고,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해야겠다. 감사한 한 해가 또 이렇게 무사히 지나갔다.


Featured image courtesy of Annie Spratt, Alexandru Tudorache on Unsplash,

Ciena

캘리포니아에서 활동하는 블로그 운영자이자 콘텐츠 제작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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