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 두살, 정착기에 들어서다

작년 <내 나이 이민 한 살, 돌치레를 하다>를 쓴 지 어느새 일년이 지났고, 3월 4일부로 나는 이 곳에서 만 2년을 꽉 채운 미국이민 3년차가 되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버린 1년동안 참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극도로 불안했던 작년 이맘 때 즈음의 나의 모습은 이제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나는 정신건강이 많이 괜찮아 졌다. 아마도 작년 여름에 어렵사리 취업이 된 이후 바빠진 생활패턴으로 우울해질 틈이 없게 된 것이 주된 이유일듯하다. 나의 이민적응 초기단계에서 첫번째로 맞이한 최대 난제였던 취업을 난 과연 어떻게 해냈던걸까. 모든것이 우연이었을지 아님 필연이었을지 누구도 모를 일이지만, 나비효과처럼 작년에 내가 했던 어떤 무언가가 행여 취업에 영향을 미쳤다면 그건 아마도 작년 여름 집근처 대학에서 수업을 들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Then, 

사실 수업을 듣는 동안인 두 달동안은, 수업에 오롯이 집중하기 위해서, 취업활동을 거의 손놓고 있다시피 해야했기 때문에 수업을 꼭 들어야하나 고민도 많이 했다. 수업을 안듣는 대신 그 기간에 이력서를 낸다고 갑자기 연락없던 곳에서 연락이 온다거나, 취업이 하루아침에 된다는 보장도 없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때 당시에는 꽤나 심각한 고민거리였었다.

1년 전 <내 나이 이민 한 살, 돌치레를 하다>글을 쓰고, 온라인 수업을 들으면서 긍정적으로 지내는가 싶었던 나는, 그뒤로 한달이 지나고 4월부터 굉장한 슬럼프에 빠지기 시작했다. 이력서 하나도 자신감있게 제출을 못할 정도로 자존감이 바닥에 곤두박질 쳤었던 시기였다. 이민을 오기 전 하늘을 찌르던 자신감은 온데간데 없었고, 1년만에 이력서 하나도 못낼 정도로 위축된 내 모습은 정말 초라했다. 걱정탓에 잠도 쉽게 청하지도 못하고, 자고 있는 신랑 몰래 나와서 전전반측 울다가 날을 새고 신랑이 일어나기 직전에 침실로 가서 자는 척을 하기를 반복했다.

한국에서 또래 친구들은 열심히 경력을 쌓고 저금을 하고 있을텐데 나는 앞으로 조금씩 나아가지 못할망정, 되레 뒷걸음을 치고 있으니 나만 늦는것 같아 무섭고, 한국에서 일했던 경력을 아예 못쓸가봐도 걱정이 되고, 이러다 정말 취업을 못해서 알바로 여기져기 옮겨 다니며 일하게 되는건 아닌가 싶었다. 딱히 내세울 기술도 없었고, 아무것도 보장이 되지 않은 현실 앞에 나는 무력하게 걱정만 하고 아무것도 못하고 있었다.

앞이 정말 깜깜했다…

한국에서 바쁘게 일하는 친구들과 가족들이 그때 당시의 내 모습을 봤다면 도대체 어떻게 이 아이가 이렇게 변했나 싶어 입을 다물지 못했을듯하다. 특히 우리 엄마는 운다고 상황이 바뀌는것도 아닌데다가, 다 큰 성인이 바보처럼 울고 있다고 크게 호통치셨겠지. 그렇게 한국에서 당당하고 자신감 있던 나는 미국에서 이민 1년만에 자취를 꽁꽁 감추었다. 한국에서의 내 모습을 상기하면 할수록 점점 더 낯설게만 느껴질뿐이었다.

경력이 없는것도 아니어서 왠만한 구인조건은 얼추 다 맞았지만, 결국 넘지 못하고 있는 높은 취업문턱에 내가 느끼는 패배감은 정말 이루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외국이라서 더 서러운것도 있었을 터. 친구들에게 말도 못했고, 말해도 이해해주지 못할것 같았다. 심지어 17시간 떨어진 고국에서 바쁘게 사는 한국의 친구들과 시간을 맞추어 통화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이 곳에 유일한 벗인 신랑에게 말하는것도 한두번이지, 외국인 신랑은 아무리 말해도 걱정만 시킬뿐 결국 나의 심정을 이해해주지 못할것 같았다.

기약없는 기다림이 너무 싫었던 그 때. 하염없이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만 있었고, 이력서도 못내고 있는 판에 결국 ‘그냥 이렇게 세월아 네월아 시간을 흘러보내느니 뭐라도 배우는게 낫겠다’ 라고 생각되어 1년전부터 생각만 해보던 근처 대학의 수업 수강등록을 하기로 바로 결정해버렸다. 그리곤 그해 5월, 집에서 가까운 대학인 Santa Monica College에 캠퍼스 투어를 신청하여 학교도 둘러보고, 입학처와 간단히 상담도 받은 후, 레벨 테스트 시험(영어, 수학)을 보고, 카운셀러와 상담까지 받은 후 등록을 마쳤다.

수업 들으러 가는 길

영어 작문수업은 한번도 수강해 본 적이 없지만 그래도 영어라면 아예 모르는 학문이 아닌지라 수업은 제법 따라갈만했다. 영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외국인들만 듣는 에세이 영작문수업이었기 때문에 교수님도 우리 레벨에 맞게 쉽게 설명을 해주었던 지라 수업을 이해하는것도 크게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영어로 에세이를 쓰는건 한번도 해 본적이 없었던 나에겐,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서는, 여전히 꽤나 어려운 수업이었다. 다행히 수업을 들으면서 바닥에 곤두박질치던 나의 자존감은 하루하루 미미하게나마 회복되었고, 엄청난 과제양 덕분에 다행히도 우울해 질 틈이 없었다. 그렇게 조금씩 자신감을 회복하면서, 수업이 끝나기 전 주부터는 손놓고 있던 이력서를 다시 몇군데 보내기 시작했었다.

6주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진행된 여름학기 수업은 그렇게 끝났고, 80점대(B학점)를 웃돌던 나의 점수는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마지막 에세이에서 높은 점수를 받으면서 나는 최종학점을 만점인 A학점을 받는 기염을 토했다. (내가 다닌 대학 시스템은 90점만 넘으면 A학점이 나오는데, A는 GPA로 만점인 4.0으로 기록된다)

내가 미국학교 수업에서 만점을 받다니…..

온라인으로 최종 성적을 확인했을 때에는 내 점수가 믿어지지가 않았다. 여러번 확인에 확인을 하고나서야 정말 만점을 받았구나 깨닫고는 집에서 컴퓨터 스크린을 앞에두고 펑펑 울었다. 미국에서 학사과정을 듣는 유학생들에게는 정말 별거 아닌, 아주 기초적인 영작문 수업일지라도 나에게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소중한 결과였다. 이 외국땅에서 노력하면 ‘나도 할 수 있다’라는 희망의 빛줄기를 발견한 느낌이랄까. 그렇게 어둡디 어두운 내 마음속에 작은 불빛이 들어왔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갈 무렵 지원했었던 곳중 한 곳에서 연락이 왔다. 신기하게도 연락이 온 그 주에 면접을 보고, 며칠 뒤 바로 채용확정이 되었다. 구직을 시작했던 시기가 그러니까, 재작년 초반. 온 기력을 다 쏟아 부을정도로 열심히 구직활동을 했을 때에는 수개월동안 연락 한.곳. 없더니, 될려던 곳이었던걸까. 면접본 후에 크게 기대하지 않았었는데 아무래도 정말 운 좋게 타이밍을 잘 만나서 채용이 된 것 같다. 어쨌뜬 갑자기 모든게 드라마처럼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었고, 나는 여름학기 수업 과정이 끝나자마자 바로 첫출근을 하게되었다.

출근하는 버스 안에서

Now, 

일을 시작한 지 벌써 8개월차다. 그 동안 나는 회사에 완전히 적응을 했고, 우리 부부는 비상자금을 (드디어) 채우고, 집 마련을 위한 저축을 시작했다. 하지만 절약을 한다는 명목아래에 지난 몇개월간 너무 회사와 집만 다니는것 같아, 주말에는 가끔이라도 어딘가 가서 추억도 좀 만들고 사진도 좀 같이 찍자고 말이 나왔다(인스타그램에 올릴 사진이 출퇴근길밖에 없다는건 인친님들이 모두가 아는 공공연한 사실이다). 가뜩이나 사진을 안찍는데 결혼하고 나니 시댁에 모일 때 찍는 가족사진만 있고, 둘이 찍은 사진이 거의 없다. 그래서 올해는 굵직굵직한 여행 계획들을 좀 세워 보았다. 피사체가 되는건 여전히 왠지모르게 챙피하지만 추억을 기록하기 위해서라도 억지로라도 해야할 일인듯 싶다. 세월이 흘러 내가 스스로 기억을 못할 때에 옛 시간들을 추억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건 현상된 사진뿐이 아니던가. (물론 동영상도있지만, 동영상에 나오는건 더 챙피하다)

그래도 곰곰히 생각해보면 지금 나의 삶이 여태까지 살아온 시간중에서 가장 안정적이고, 평화롭고, 모자르지도 넘치지도 않고, 그리고 무엇보다 큰 스트레스없이 정말 행복한 시간인것 같다. 정말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요즘 행복지수 완전 밝음이다. 친정 및 시댁과도 문제없이 잘 지내고 있고, 가족들 그리고 우리 부부 모두 건강하고, 회사에서도 별다른 큰 스트레스 없이 잘 일하고 있고, 신랑도 결혼 전보다 훨씬 더 잘해주고 챙겨줘서 진짜 결혼하길 너무 잘한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남은 한해동안 소중하게 얻은 기회인만큼 회사의 선택이 좋은 선택이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똑소리나게 일해서 회사에서도 인정받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사진을 많이 찍어야지!


같이찍은 최근사진이 없어 2015년도 사진 소환

지난 2년을 돌아보며, 

한국에서의 내 모습을 회상하면, 나는 늘 자신감에 차있었고, 무서울게 없었다. 마음먹고 하면 모든게 순조롭게 잘 진행되거나, 해결되었었다. 하지만 당시 주변으로부터 받는 책임감과 기대감, 그리고 그에 부흥하기위해 내가 내 스스로에게 거는 기준이 너무 높고 버거웠다. 이러한 주변의 모든 부담에 벗어난 미국생활은 첫 6개월동안(분가하기전까지)은 꿈같은 휴식기처럼 느껴졌다(나에게 어쩌면 당분간, 적어도 은퇴할때까지는, 두번 다시 없을 휴식기였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곳에서 한 가정의 장녀도, 한 회사의 팀장도 아닌, 이제 막 이민와서 모든 걸 새로이 배워야하는 새내기였다. 모두가 이방인인 나를 챙겨줄지언정, 댓가로 기대하는 건 없었다. 한국에서 이것저것 챙겨줘야할게 많았던 외국인 신랑도, 이 곳에서는 말하지 않아도 이미 그가 먼저 나를 챙겨주고 있었다. 항상 챙겨주던 입장에서 챙김을 받으니 마음이 그렇게 편해질 수가 없었다.

물론 신랑이 취직을 하게된 후 자연스럽게 시댁에서 나와 분가를 하고 나서는 잔인한 물가의 쓴 맛도 보았고, 더불어 여러번 취직의 고배를 마시며 슬럼프를 겪는 등, 짧지만 긴 1년동안 마음고생을 하며 일을 하는게 얼마나 나의 삶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 어느때보다 겸손해지고 삶에 주어진것에 더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된 것 같다. 환경이 바뀌지 않았다면 나는 아주 오랫동안 이 모든걸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한국에서는 감사해야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들과 심지어 쉽게 불평했던 부분들이 타지에 살면서 그때 당시 내가 얼마나 무지했는지 느끼게 되어 챙피하기도 하고, 그리고 가끔 그때가 그립기도 하다.

세월이 지나고 또 환경이 변화면 지금이 그립다고 하겠지. 후회없도록 매일 최선을 다해서 일하고, 사랑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겠다. 다음 1년은 큰 걱정거리 없이 건강하게 즐거운 추억을 많이 만들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민 후 취업난으로 마음고생하시는 분들께:

조금 느려도 포기만 하지 않으시길 바래요. 저랑 비슷한 시기에 이민오신 분들도 수개월 (또는 저처럼 1년)이 지나도록 취업을 못하고 전전긍긍하다가 결국 나중에는 다들 다 자리잡고, 지금은 각자 자리에서 열심히 빛을 발휘하고 계신분들이 많으세요. 저처럼 중간에 몇달 이력서를 못보낼 정도로 자존감이 떨어져있어도 괜찮아요. 집 근처에 혹시 유료든 무료든 수업을 들을 수 있는 Community College 또는 Library 또는 Community Center가 있다면 관심가는 수업 하나둘정도 들으시는것을 저는 적극 추천드리고 싶어요. 꼭 영어수업이 아니어도 되요. 집안에 계속 있는것보다 나가서 사람들과도 조금이나마 어울리고, 무언가를 배우고 (교수님께)피드백을 받게되면 별거아닌 작은 칭찬이라도 큰 원동력이 되더라고요.

같은 처지에 있다면 공감도 되고 힘도 받으실것 같아서 긴 고민끝에 저의 이민두살 일지를 올립니다. 지금 외국에서 일하고 있는 분들도 외국인 신분으로 아마 다들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취업을 하셨으리라고 생각되요. 구직중이시라면 포기하지 마시고요, 구직에 성공하셨다면 앞으로 더욱더 승승장구하시길 기원합니다.

모두 행복가득한 봄날을 보내고 계시길 바래요!


Ciena

캘리포니아에서 활동하는 블로그 운영자이자 콘텐츠 제작자입니다.

Press ESC to close